임주(任 澍)
본문
豊川任氏 6世 어사대부(御史大夫) 임주(任 澍)
仕 고려충열왕(高麗忠烈王) 지원계미(至元癸未) 위경상도추동등안찰(爲慶尙道按察) 일작 염사역관(一作廉使歷官) 어사대부(御史大夫) 일작 조정대부(一作朝靖大夫) 혹칭 조봉대부감문의대장군(惑稱朝奉大夫監門衛大將軍) 치사(致似)
1283년(충렬왕 9)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를 거쳐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올라 감문위대장군(監門衛大將軍)으로 치사(致仕)하였는데, 풍천 임씨는 그의 아들 대(代)에 와서 백파(伯派:자송(子松))와 중파(仲派: 자순(子順))으로 크게 나뉘며 두 파에서 고루 인물을 배출하여 가문을 중흥 시켰다.
상호군 (上護軍) 임천유(任天裕)의 아들이다.
고려 충렬왕 때 경상도 추동등 안찰사를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감문위 대장군(監門 衛大將軍)을 지내고, 도호부(都護府)인 풍주(豊州: 現 황해도 풍천)를 식읍으로 하사받았으며, 송경창선방(松京昌善坊) 제텍(第宅)을 하사받아 풍천임씨의 시원을 이루게 되였다고 한다.
官 御史大夫一作朝靖大夫 或稱朝奉大夫監門 衛大將軍致仕 墓在豊川府東五里許上里礴石 山下子坐原有表石十代孫絖撰陰記
室 昌德陣氏主簿同正弘道女禮寶寺 丞同正誼孫司宰卿力升曾孫豊川洪元烈外孫
舊譜稱公始來東國賜籍豊川賜第松京昌善坊傳者曰以魯國公主勝徒而來又日以宋朝臣國仄而 奔兩 ? 背詳見譜序未知孰是豊川府東十里許有宅基基東又有樂天亭故址壇水石之勝至今人 稱御史公遺墟西距墓所可五里墓下入齊官置田若千並與舊基屬宗人之居府境者以九月望日設 祭歲以爲常
(史料)
옛 족보에 전해 내려오기를 [공의 부조(父祖) 이상 5 대는 모두 중국 소흥부 자계현(紹興府慈溪縣) 출신이었는데 공이 원(元)나라 때 원나라의 공주(公主)가 고려 왕실로 시집올 때에 모시고 나와서 처음으로 고려에 들어왔으며, 고의 벼슬은 어사대부(御史大夫)라 고도 하며 또는 조정 대부(朝靖大夫)의 계품으로 감문위대장군(監門衛大將軍) 으로 있다가 치사(致仕)하였다 고도 기록되었고 실(室)은 창덕진씨(昌德陳氏)인데 주부 동정(主簿同正) 홍도(弘道)의 딸이라고 되어 있으며 무덤은 송화군 상리면 신성동에 있다.
그런대 공이 처음으로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말에 대하여 과거의 학자들도 의문 내지는 부정적인 태도를 가져왔다.
공의 사적이 역사에는 전혀 실린 곳이 없고 경주 불국사(慶州佛國寺)에서 발견된 경상도관찰사선생안(慶尙道觀察使先生案) 곧 역대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사람의 이름과 그 재임 기간을 기록한 책)에 고려 충렬왕(忠烈王)9년(1283)년에 경상도 추동등 안찰사(慶尙道秋冬等按察使)로 왔다는 정확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
원나라의 공주가 교려로 시집온 것은 충령왕 이후인 충혜왕(忠惠王)때부터 였으니 연대적으로 들어맞지 않는다고 만휴당(萬休堂) 유후(有後)도 이 전설을 배격하였다.
그러나 우리 풍천임씨(豊川任氏)가 문헌에 나타난 것은 공이 처음이었고 과거에도 공을 거의 시조와 같이 생각해 왔었던 것은 사실이요,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공의 아들인 서하부원군(西河府院君) 자송(子松)과 민부전서(民部典書) 子順)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공의 묘에는 1642(인조 20)년에 10대 손인 황해도 순찰사(黃海道巡察使) 임광(任絖)이 지은 비석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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