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송(任子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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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서하부원군7世 임자송(任子松) 백파시조(伯派始祖)
고려의 문신,어사(御使)澍)의 아들, 1321년 동지밀직사사를 거쳐 1324년 익찬공신의 호를 받고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1327년(충숙왕 4) 1등 공신으로 서하군(西河君)에 봉해졌고 1330년 원나라에 있는 세자 정(禎:충혜왕)이 왕으로 결정되자 원나라에 객성부사(客省副使) 칠십견(七十堅)이 국인(國印)을 가져갈 때 따라갔으며,이해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27년(충숙왕 복위8)조적(曺적)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 1342년 1등 공신이 되었다.
본관은 풍천(豊川) 어사 임 주(任 澍)의 큰 아들님 이시다. 고려 충숙왕(忠肅王)과 충혜왕(忠惠王) 양대 왕조에 벼슬하여 그 사적이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있다. 이 시대는 고려왕조로서는 대내 대외적으로 상당히 정치적으로 혼란이 있던 시기였으니 충숙왕의 아버지인 충선왕이 원(元)나라에 머물러 있던 중 중상모략을 입어 지급의 티베트 지방 살사길(撒思吉)이라는 곳까지 유배되었다가 북경(北京)으로 돌아와서 죽고 충숙왕은 그의 왕비인 복국공주(복國公主)가 죽었다. 이때 충선왕의 조카로 원나라의 부마(駙馬)가 된 심왕(瀋王)고는 충숙왕이 임금이 된 뒤에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데리고 있을 작정으로 자기의 세자로 삼았는데 충성 왕이 죽은 뒤에 고는 자기가 고려의 임금 자리를 빼앗기 위하여 갖은 모략과 흉계를 써서 충숙왕을 위태롭게 하였다. 여기에는 고려 사람으로 원나라에 가 있는 조적(曹적), 채하중(蔡河中) 등 악당들이 가담하여 원나라 황제에 대하여 중상과 모략을 일삼았다. 마침내 충숙왕은 그의 왕위를 아들인 춘 혜왕에게 양위하고 자기는 원나라에 머물러 있었다. 충숙왕이 외국에 있는 동안 충혜왕은 방탕과 음란을 일삼아 정치가 매우 문란하게 되었으므로 충숙왕이 다시 돌아와서 임금이 되고 충혜왕은 물러났다. 충숙왕이 두 번째로 임금이 된 지 7년 만에 죽고 다시 충혜왕이 임금이 되었는데 이때에도 심왕고(瀋王고)는 왕위를 노리고 조적(曹적) 등을 시키어 직접 무력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충혜왕과 그의 시위선 하의 응전 때문에 이를 물리치고 조적(曹적)이 전사함으로 인하여 이 문제는 일단락을 거두게 되었다. 부원군(府院君)은 이 시기에 활약한 분이다.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난 것을 추려보면 같이 기록되었다. 충숙왕 6년에 원윤(元尹) 임자송(任子松)을 원나라에 보내어 공주(公(공) 主(주))가 사망하였음을 통고하였다. 동 8년 동지밀사사(同知密司事)에 임명하다. 동 11년 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와서 임자송을 직조원량익찬공신(直朝元亮翊贊功臣)에 봉하고 아울러 첨리평의(僉理評議)에 임명하다. 14년 임금이 교서를 내리기를 [내가 원나라 북경에 5년간 머물러 있는 동안 간신이 국가를 위태롭게 하려 하는데 나를 시종(侍從)한 신하가 절의를 다하여 보좌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였으니 그의 공로가 기록할만하다. 그러므로 첨의정승(僉 議政丞) 윤석(尹碩), 화평군(化平君) 김심(金深), 상당군(上黨君) 한악(韓渥), 서하군(西河君) 임자송(任子松)……. 중간생략…. 등 1등 공신으로 삼고 이하생략] 동 17년 2월 원나라에서 칠십견(七十堅)을 보내어 국왕의 인(印)을 줄여오기를 요청하므로 서하군 임자송((西河君 任子松)과 만호(萬戶) 권겸(權謙) 등이 나라의 인을 가지고 원나라에 가다. [동년 4월 김심(金深)을 도첨의 중찬(都僉議中贊), 임자송(任子松), 원충(元忠), 전언(全彦)을 찬성사(贊成事)에 임명하다] 충혜왕(忠惠王 후 3년(後三年) [6월 임금이 교서를 내리기를 역적 조적(曹적)이 반란을 도모한 뒤에 내가 북경에 가서 있는 동안 국내의 사정이 복잡한 틈을 이용하여 간신으로 남아있는 물리들이 거짓말을 꾸며내어 선동하여 위기를 조성하려 하였으나 나를 호종하는 신하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변하지 아니하고 이 몸을 보좌하였으니 그 크나큰 공로는 산천이 변할지라도 잊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석(尹碩), 정승(政丞) 채하중(蔡河中),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김석견(金石堅) 정승(政丞) 이능간(李陵幹), 이문(李門), 인홍빈(印洪彬),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여온(金永旽) 서하군 임자송((西河君 任子松)……. 중간생략…. 등을 1등 공신으로 삼고, 화상을 그리어 벽에 걸어두고 부모와 아내는 3등급을 초월하여 작을 봉하고 아들 한 사람은 7품에 임명한다. 아들이 없을 때는 조카나 생질로 대충하고 사위는 8품에 임명한다. 토지 百 결과 노비(奴婢) 10명을 내린다…….아래는 생략
이상이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난 부원군의 기록이다. 이상의 기사를 가지고 당시 고려의 정치정세와 종합하여 본다면 부원군은 충선(忠宣), 충숙(忠肅), 충혜(忠惠)의 3대의 임금을 섬겼고, 충숙왕이 원나라에 가서 있을 때는 그를 모시고 있으면서 심왕(瀋王) 일당의 음모를 분쇄하기에 힘써서 그 공로로 서하군(西河君)의 봉작을 받았고 마침내는 윤석(尹碩) 등과 함께 조적(曹적)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려 말기의 학자인 이제현(李薺賢)은 공과 함께 1등 공신에 봉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공의 셋째아들인 덕수(德壽)가 이제현의 사위가 된 것을 보아서도 공과의 사이가 매우 가까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족보에는 공의 벼슬이 시중(侍中)·판삼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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