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곡 묘산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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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4-07-11 15:31 조회54회 댓글0건본문
陶谷墓山事跡碑
도곡묘산 사적비
풍천부(豊川府) 남쪽 20리 박달산(朴達山) 아래에 위치한 도곡(陶谷) 신좌(辛坐)의 넓은 언덕에 한 분묘가 있어 옛 늙은이들이 이를 풍해군(豊海君)의 분묘라고 서로 전해 왔으니 풍해군은 실로 임씨의 선조 휘(諱) 천유(天裕) 이시니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휘(諱)도(徒)의 아드님이시다.
영종(英宗) 계축년 영조 9년 (서기 1733년) 간에 그 산 아래서 사는 사람을 찾았다가 묘소 아래 100여 보 되는 곳에서 파쇄된 돌 한 조각을 얻었으나 단지 한 임(任)자만 있어 감히 공의 묘소로 질정(質正)하지 못하였다.
그 뒤 54년 병오 정조 10년 (서기 1786年)에 종인(宗人) 봉겸(鳳謙)이 묘소 좌편 근지에서 나무뿌리를 캐내다가 크기가 말(斗)만 한 단절된 비(碑)를 취득하였는데 좌변(左邊)은 떨어져 나가서 점획(點畫)이 있는 것도 같았으나 자체(字體)를 변별하기가 어려웠다.
그 첫 줄에 이르기를 [현부고 임도(顯父考任徒)]라 하였고 다음 줄에 이르기를 [현모비안씨(顯母妣安氏)]라 하였으며 그다음 줄에 이르기를 [효자 봉직랑(孝子奉직郞)]이라 하였으니 무릇 세줄(三行) 15자(字)인데 새겨진 글의 체식(體式)이 지금과는 크게 다르고 옛일을 무리하게 풀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양대(兩代)의 분묘가 요컨대 이 언덕 밖으로 벗어나지는 않을 것인데 능곡(陵谷)이 무너져서 총영(塚塋)을 고정할 도리가 없으니 후인들의 한 됨이 어떠하겠는가! 경외(京外)의 모두 모여 살펴보고 근세 사대부집에서 현재 행하고 있는 예에 의하여 그곳에 단(壇)을 세우고 삼가 그 사실을 위와 같이 썼으며 경(經). 권(權)을 참작하여 세일 제(歲一祭)를 지방(紙榜)으로 양대의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같은 날에 합제(合祭) 하는 것이 거의 예의(禮意)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이에 감히 말미에 이를 기록하여 하여금 영구히 준행(遵行)하는 방도로 삼도록 하는 바이다.
승정(崇禎) 기원후 三년 정미 (정조 11年. 서기 1787년) 후손 사헌부 대사헌 희증(希曾)은 삼가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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